명작의 숲을 거닐며 -2
나이는 들어도
늘 푸른 인생과 신앙을 잃지 말았으면!
-사무엘 울만의 “청춘”
조 신 권(연세대 명예교수/총신대 초빙교수)
∥감동의 명문구들∥
청춘이란 삶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그것은 마음가짐(상태)이다.
Youth is not a time of life; it is a state of mind
청춘은 소심함을 뛰어넘는 혈기왕성한 용기요,
안락함을 초월하는 강인한 모험심을 뜻한다.
Youth means a temperamental predominance of courage over timidity,
of the appetite for adventure over the love of ease.
청춘은 삶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이다.
Youth is the freshness of the deep springs of life.
단순히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상이 황폐해질 때 늙는다. 세월은 피부의 주름살을
지게 하지만 열정의 상실은 영혼의 주름살을 지게 한다.
Nobody grows old merely by a number of years.
We grow old by deserting our ideals. Years may wrinkle the skin,
but to give up enthusiasm wrinkles the soul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경이로움에 대한 동경과 어린이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
그리고 삶의 놀이를 즐기는 흥겨움이 있다.
There is in every human being's heart
the lure of wonder, the unfailing child-like appetite of what's next,
and the joy of the game of living.
영감은 끊어지고 그대의 가슴이 싸늘한 눈과 같은 냉소와
얼음 같은 비관으로 덮이면, 비록 그대가 이십이라도 늙은 것이다.
영감의 안테나를 더 높이 세우고 낙관의 전파를 끊임없이 잡는 한
나이 여든이 되어도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죽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
When the aerials are down, and your spirit is covered with snows of cynicism
and the ice of pessimism, then you are grown old, even at twenty,
but as long as your aerials are up, to catch the waves of optimism,
there is hope you may die young at eighty.
사무엘 울만의 생애
위에 묶어놓은 감동의 명문구들은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 1840-1924)의 “청춘”(Youth)이라는 시에서 뽑은 것들이다. 울만은 1840년 4월 13일에 독일의 헤칭겐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돌이 지난 뒤 그의 부모는 프랑스 알자스 지방으로 이사를 갔다가, 11살이 될 무렵 미국으로 이민 왔다. 울만은 미국생활 10년이 지나 21세 되던 해에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남부군이등병으로 입대해서, 1년 6개월 동안 군에 복무하는 중 두 번 부상을 입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25세 때 나체스로 옮겨갔다.
그는 나체스에서 직물과 식료품, 농산물을 파는 상점을 열어 열심히 사업을 했다. 2년이 지나 27세 때 엠마라고 하는 처녀와 결혼하였고, 나체스의 교회와 지역 사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을 했다. 그곳에서 또한 시의원으로 당선되어 3년 동안 시의원으로 봉직하였고, 교육원의 감찰위원회 위원으로서 나체스의 학교들을 감독하기도 하였다. 그는 다시 앨라배마 주 버밍햄으로 와서도 교육위원회 위원으로서 봉사했다. 거기서 교육위원회 위원으로서 18년을 근무하였고, 교육위원회 위원장으로서 7년을 봉직했다. 그는 특별히 약한 입장에 있는 흑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50세를 지날 무렵, 그는 평신도 율법사가 되어 엠마뉴엘 교회를 지도하면서 신앙과 자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약 3년 2개월 동안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56세가 되던 해 1896년에 사랑하는 아내 엠마를 잃었다. 그는 그 뒤 28년 동안 혼자 살면서, 아내를 생각하며 시를 썼다.
개인적으로 그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체스에서 직물과 식료품 및 농산물 등을 취급하는 상점을 경영했고, 버밍햄에 와서는 철물회사를 만들어 경영했으며, 토지회사를 만들어서 사장도 하였다. 또 버밍햄에 있는 은행에 관여해서 이사로 근무하다가, 뉴욕생명보험회사의 영업지부장이 되어 청력과 시력이 쇠약해져서 일을 할 수 없는 68세까지 봉직했다. 70대에 접어든 울만은 사색과 교회 일에 전념하면서 시만 썼다. 그가 1920년 80세 생일 기념식이 성대히 열렸으며, 이를 기념하는 시집 『80년 세월의 정상에서』가 36명의 가족과 지인들에 의해 편집되어 사후 출판되었다. 이 책의 권두를 장식한 시가 “청춘”이다. 사무엘 울만은 1924년 3월 21일 버밍햄에서 향년 84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맥아더 장군의 좌우명이 된 “청춘”
울만이 이 “청춘”을 지은 것은 78세 때라고 한다. 그의 죽음과 함께 시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는데, 의외의 인물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의외의 인물이 다름 아닌 맥아더 장군이다. 맥아더 장군은 1945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을 때 동경에 왔다. 그는 자기 사무실 벽에 울만의 ‘청춘’을 걸어 놓았다. 한쪽에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 초상화를 걸고, 또 한 쪽에는 링컨 대통령 초상화를 걸어 놨는데, 그 가운데에는 “언제까지나 젊음에 머무는 방법”이라는 서판(書板)을 걸어 놓았다. 그것이 바로 ‘청춘’이라는 시다.
맥아더 장군은 6․25 전쟁 발발 다음해인 1951년 4월에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고별 연설을 했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로 끝낸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맥아더 장군이 이 연설을 했을 때 미국 상․하원 의원들은 “마치 우리가 지금 신을 보는 것 같다”고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연설의 마지막을 장식한 명언은 그가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시절에 막사에서 동료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의 후렴 구절이었는데, 그 후렴 구절의 정신이 바로 사무엘 울만의 ‘청춘’의 정신과 동일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은 이 ‘청춘’이라는 시를 자기 사무실 벽에 걸어서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맥아더 장군은 1955년 LA의 한 집회에서 울만의 이 시를 인용하며 “청춘은 절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그것은 마음의 상태다”라는 신념으로 75살에도 자기는 아직도 젊다는 연설을 했다고 한다. “청춘”이라는 시는 바로 맥아더 장군의 좌우명이었다.
특이한 시인 울만과 그의 대표시 “청춘”
사무엘 울만은 일반적인 시인하고는 다른 직업시인, 곧 비전문적인 시인이다. 그는 한 평생 자기 사업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고, 자기가 속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한 신앙인이다. 그의 시는 바로 이렇게 성실한 삶을 다 살고 나서 뒤를 돌아다보면서 쓴 것들이다. 울만의 시는 모두 54편이 있는데, 그 중에서 ‘청춘’이 가장 감동적이지만, 다른 시들도 사람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는다. 영어 원문은 제외한 채 “청춘”이라는 시를 번역문으로만 소개하겠다.
“1연 청춘이란 삶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그것은 마음가짐(상태)이라네./장밋빛 볼과 붉은 입술도 아니며 유연한 무릎도 아니라/그것은 강인한 의지, 탁월한 상상력, 왕성한 감정을 말함이니,/그것은 삶의 깊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청신함이라네./ 2연 청춘은 소심함을 뛰어넘는 용기요/안락함을 초월하는 강인한 모험심을 뜻 한다네./ 때로 이것은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에게 더 청춘이 있다네. 3연 단순히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이 황폐해질 때 늙는 다네. 세월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지만 열정의 상실은 영혼의 주름살을 늘인다네. 걱정, 두려움, 자기불신은/ 우리의 마음을 꺾어 놓고 기력을 먼지처럼 사라지게 한다네. 4연 예순이든 열여섯이든/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는/경이로움에 대한 동경과 어린이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그리고 삶의 놀이를 즐기는 흥겨움이 있다네. 5연 그대와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에/무선 송신국이 있나니 사람들과 무한한 하나님으로부터/아름다움, 희망, 위안, 용기, 능력을 받기만 하면/그대는 청춘이라네. 6연 영감은 끊어지고 그대의 가슴이 싸늘한 냉소의 눈과/얼음 같은 비관으로 덮이면, 비록 그대는 이십대라도 늙었다 할 것이나,/영감의 안테나를 더 높이 세우고 낙관의 전파를 끊임없이 잡는 한/나이 여든이 되어도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그대는 죽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네.”
이 시에 따르면, 청춘은 인생의 어느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로서, 소심함을 뛰어 넘는 용기요, 안락함을 초월하는 강인한 모험이며, 진리를 찾고자 하는 탐구심 같은 것이다. 단순히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포기할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지게 하지만, 정열을 포기하면 영혼에 주름이 잡힌다. 신앙을 가지면 젊어지고 회의를 가지면 늙게 된다. 자신(自信)을 가지면 젊어지고 자신을 잃으면 늙는다. 희망을 가지면 젊어지고 절망을 가지면 늙게 된다. 특히 하나님과 자연으로부터 어떤 영감도 받지 못하면 나이가 18세라도 늙은이라 할 수밖에 없다.
영혼에 주름살은 늙음의 흔적
옛날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 가운데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이라는 한자어로 된 명구가 있다. 이 말은 ‘젊은 사람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는 뜻이다. 여기서 ‘젊은 사람은 늙기 쉽다’라는 표현은 청년의 덧없음을 정확하게 표현해 준 말이다. 그러나 나이가 적다고해서 젊은 것도 아니고 나이가 많다고 해서 늙은 것도 아니다. 세상엔 18세 노인이 있을 수 있고 70세 청년이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을 청년이라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을 노인이라 할 수 있는가? 요즈음 각 대학들의 도서관에 가보면 토익(TOEIC) 900점을 넘지 않으면 취직이 힘들다 하여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엘리트 대학생들을 수없이 만날 수가 있다. 그들 가운데는 아직 이십대인데도 ‘이미 나이가 많아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분명 그렇게 학생 시절을 보내면 일류 기업에 취직할 수는 있고 높은 월급을 받는 엘리트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에 청춘의 때에만 마음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특유한 열정은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도 소중한 청춘의 날을 매일 한 장씩 아무런 열정이나 이상도 없이 떼어내 버린다면, 그런 20대의 젊은이를 청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청춘을 보내는 것이 공허하다면,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매몰되어 자기를 돌보지 않고 청춘의 시기를 보내는 것은 더욱 이상을 포기한 허무적 행위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신문기사에서 읽어본 미국출신의 할머니 경우는 완전히 다른 경이로운 늙지만 젊은이다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우스, 키보드, 모니터가 무엇인지조차도 몰랐던 앤 클리브랜드(Anne Cleveland)라는 84세의 할머니는 그 나이에 이젠 인터넷에서 능수능란한 정치 블로거(blogger)가 되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정보화 교육을 받으면 삶에 대한 자신감도 얻고, 새로운 활력과 건강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블로깅(bloging)을 통해 소통이 끊어졌던 손주나 자식세대들과 공감대를 찾을 수 있어서 대화를 쉽게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열심히 젊은이들로부터 배우면서 살아가는 미래에 대한 설계를 꾸미는 비전이 있는 할머니이었다. 그런 그녀를 84세라고 해서 어찌 늙은이 취급만 할 수 있겠는가?
울만이 노래한 것처럼 청춘은 ‘삶의 깊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청신함 같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깊은 샘’이란 곧 울만이 말하는 소심함을 뛰어넘는 용기와 안락함을 초월하는 강인한 모험심, 그리고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마음과 이상, 즉 젊음의 생명수가 분출하는 영천(靈泉) 같은 것을 가리킨다. 세월은 우리의 피부에 주름살을 주지만 신앙의 열정을 포기하면 영혼에 주름살이 생긴다. 이상이 황폐화된 젊은이와 생명수가 넘치는 늙은이 중 누가 더 젊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영혼에 주름살이 지면 나이가 20대라도 늙은이다. 주름살은 노년의 흔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천하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시는 우리들의 영혼에 주름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늙음과 죽음은 선하고 좋은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잃은 장미처럼 추하고 악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안에 생기는 노년의 흔적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젊어질 수 있는 것은 ‘청춘’이 마음가짐과 하나님의 생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으로 놀라운 일을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몸은 청년에서 장년으로 가지만, 영혼은 생명의 절정에 이르면 노년으로부터 청년으로 변화된다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모습을 잃지 않으려면 영혼에 주름살이 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영혼에 주름살이 지면 물이 없어서 마른 고목 같이 되고 만다. 마른 고목은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다. 그것은 푸른 잎도 내질 못하고 열매도 맺을 수가 없다. 그늘이나 아름다운 풍경도 줄 수가 없다. 우리는 흔히 사람을 나무에다 비교할 때가 많은데, 특히 어린 아이들을 푸른 꿈나무라고 한다. 시편 1편 3절에서는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푸른 나무 되는 비결을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 시 1편에 따르면, 그 비결은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하여 얻는 주의 영과 생명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늘 공급받는 사람은 ‘늘 푸른 나무’ 곧 ‘상록수’(常綠樹)와 같다. 그것도 사막에서 시냇가로 옮겨 심겨진 나무와 같다. ‘사막’은 곧 생명의 물이 없는 이 ‘세상’을 상징한다. 예수님을 모를 때는 사막에 서 있는 나무와 같지만, 주님과의 사귐을 통해 새로워지면 ‘시냇가,’ 곧 생수의 세계로 옮겨진다. 시냇가로 옮겨진 사람은 ‘물’로 표상되는 ‘말씀’을 즐거이 묵상하고 ‘성령’과 깊이 교제하는 가운데 그 원천으로부터 생명수를 풍부하게 공급받게 되므로, 신앙의 뿌리를 깊이 박고 크게 자라게 된다. 뿌리가 깊으면 바람이 아무리 세게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좋은 꽃과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런 나무는 가뭄에도 그 품격이 늘 청청하며 물이 마르지 않기 때문에 생명력이 넘쳐서 번성하게 된다. 우리가 늘 푸른 인생과 신앙을 잃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영천으로부터 우리의 이상과 신앙의 열정 및 탐구심에 언제나 푸른 힘을 더해주는 생수를 늘 공급받아야 한다. 생수를 늘 공급받지 못하는 나무가 푸를 수 없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늘 푸른 인생과 신앙을 지켜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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