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숲을 거닐며 -3
현실의 좌절 가운데서도 내일의 부활만 바라 볼 수 있다면!
-C. S. 루이스의 『사자와 마녀와 옷장』
조 신 권(연세대 명예교수/총신대 초빙교수)
∥절정의 장면∥
하얀 마녀가 다시 소리쳤다. ‘저놈을 묶으라니까!’ 마귀 할멈들은 재빨리 뛰어나갔다. . . . 그들은 거대한 사자를 벌렁 눕히고 네 발을 꽁꽁 묶으며, 마치 대단히 용맹스런 일이라도 한 듯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 . . 그러나 사자는 적들이 밧줄을 너무 팽팽하게 잡아당겨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까지도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더니 그들은 돌 탁자 쪽으로 사자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마녀가 말했다. ‘잠깐! 먼저 저 놈의 털을 깎아 내, 털을 밀어 버려!’ 잔인한 야수 하나가 커다란 가위를 들고 앞으로 나와 아슬란의 머리 곁에 웅크리고 앉자, 마녀의 추종자들로부터 비열한 웃음소리가 까르르 터져 나왔다. 싹둑! 싹둑! 싹둑! 가위질 하는 소리가 들리며 곱슬곱슬한 황금빛 털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잔인한 야수가 뒤로 물러서자,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두 아이는 그제야 갈기가 없어져 전과는 아주 딴판으로 왜소해 보이는 아슬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적들 또한 달라진 아슬란의 모습을 보았다. 한 놈이 소리쳤다. ‘원, 세상에! 고작 덩치 큰 고양이었잖아!’
“Bind him, I say!" repeated the White Witch. The Hags made a dart at him. . . . They rolled the huge Lion over on his back and tied all his four paws together, shouting and cheering as if they had done something brave. . . . But he made no noise, even when the enemies, straining and tugging, pulled the cords so tight that they cut into his flesh. Then they began to drag him towards the Stone Table. "Stop!" said the Witch. "Let him first be shaved." Another roar of mean laughter went up from her followers as an ogre with a pair of shears came forward and squatted down by Aslan's head. Snip-snip-snip went the shears and masses of curling gold began to fall to the ground. Then the orge stood back and the children, watching from their hiding-place, could see the face of Aslan looking all small and different without its mane. The enemies also saw the difference. "Why, he's only a great cat after all" cried one.
위의 글은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동화집 전 7권으로 집성된『나니아 연대기』(The Cronicles of Narnia)의 2권 『사자와 마녀와 옷장』(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에 나오는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장면에 대한 묘사부분이다. 루이스가 쓴 50권이 넘는 책들 중에서도 이『나니아 연대기』야말로 그에게 불후의 문학적 명성을 가장 확실하게 안겨준 작품이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동화이지만, 뜻밖에도 그 속에 치밀하게 짜진 내용이 감쪽같이 숨겨져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하여 이 작품에 숨겨져 있는 신비로운 진리를 살펴보겠다.
무신론자로부터 기독교도로
루이스는 1898년에 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아일랜드 성공회 사제의 딸이었다. 루이스가 4살 때 그의 개 잭시(Jacksie)가 차에 치어 죽었는데, 그 때부터 루이스는 자기 이름을 잭시라고 했고 나중에는 잭(Jack)으로 알려졌다. 그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중세문학과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치면서 소설, 평론, 동화 등을 썼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권위 있는 『옥스퍼드 영국문학사』가운데 한 권을 저술했으며, 중세문학과 밀턴, 및 스펜서에 대한 몇 권의 책을 쓴 영문학자요, 기독교 신앙과 의식에 대한 저작들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던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기독교 변증가였다.
루이스를 20세기의 가장 기억할 만한 기독교 변증가로 평가하지만,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까지는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그러던 중 1920년대부터 10여 년 간 그는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게 되었다. 그가 유년시절에 버렸던 신앙을 다시 찾게 된 사건은 그의 자서전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에 아주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씨름하다가 결국은 지적으로 정직한 자세를 취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그로써 그는 회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받아들인 위대한 결단의 순간을 이렇게 고백한다.
“모들린 기숙사에 있을 때였다. 밤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하도 쉴라치면 내 편에서는 그렇게도 부딪치기를 원치 않았던 그분이 무정하게도 끊임없이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려워 피하기만 하던 바로 그분이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1929년 마지막 학기에 나는 드디어 항복하고 말았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어 기도했다.”
이렇게 회심한 이후, 그는 열렬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변화된다. 루이스는 그의 많은 글을 통해 어느 신학교 교수보다 더 훌륭하게 기독교 신앙의 타당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무신론자였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교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나 기독교인이 되길 원하지만 자기가 지닌 지식의 방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갖게 해주는 훌륭한 전도자였다.
특히 그의 책을 통해 크게 영향력을 받은 사람으로 찰스 콜선(Charles W. Colson)을 들 수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된 정치적 음모의 중심인물이었던 그는 레이테온회사의 사장이었던 톰 필립스(Tom Philips)의 권유로 루이스의 『내가 믿는 기독교』를 읽고 나서, 완전히 회심하게 되었고 죄수들에게 선교하는 일에 헌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루이스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영문학 교수에서 회심하여, 믿지 않았던 시절을 바탕으로, 무신론자들의 심리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믿지 않는 것보다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명증해보여준 기독교도가 되었다.
십자가의 보혈을 지나 부활로
“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이라는 대 주제를 동물우화의 형태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슬란(Aslan)이 나니아를 건설한 지 60년이 지난 후에 페번시가(家)의 네 아이들, 곧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가 행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다. 네 아이들은 디고리 커크 노(老) 교수의 저택에 있는 옷장을 통해 나니아로 들어가게 된다. 디고리는 나니아 나라를 다녀온 사람으로서 거기서 사과 씨를 가져다가 심어서 자라난 나무를 가지고 옷장을 만들었다. 그가 만일 옷장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네 명의 아이들은 별일 없이 여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신비탐험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관문을 제공한 사람은 디고리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기독교 세계관이 이렇게 우화의 형태로 극명하게 구현되어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이라는 네 개의 기둥에 의해 지지되어 있다. 이 나니아의 세계는 두 질서, 즉 창조(선)의 긍정 질서와 파괴(악)의 부정 질서가 충돌하면서 모순, 갈등, 긴장관계로 진행되다가 새로운 합(Synthesis)으로 종결되는 세계다. 새로운 합은 곧 그리스도의 사랑이 구현되는 십자가의 보혈로 이루어지는 구원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 인간의 모든 악은 포섭 통합되어 선으로 승화 된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서상한 두 질서 사이에서 마치 시계추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괴로워하는 이원적인 인간에 대한 묘사를 축으로 해서 전개된다. 이런 이원적인 인간이 마녀 편에 서게 되면 파멸되고, 아슬란을 따라가면 생명을 풍성하게 얻게 된다는 것이 루이스가 제시하는 기독교 세계관의 요체다. 페번시가의 네 아이들 중 특히 이런 인간을 대리하는 전형적 인물인 에드먼드를 통하여 그런 신비로운 진리를 확인해 볼 수 있는데, 그 사실을 살펴보겠다.
1. 악의 질서를 대표하는 하얀 마녀
네 아이들의 대 모험이 진행되는 무대인 ‘나니아 나라’는 말하는 동물들과 신화적인 존재들이 있는 곳이다. 나니아에는 하얀 마녀가 거주민을 거의 학살하고, 적들을 모두 석상(石像)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그곳을 크리스마스가 없는 영원한 겨울 상태로 만들고서 자신은 여왕이 되어 통치하고 있다. 루시는 하얀 마녀를 “하얀 마녀가 누구야?”라고 묻는 에드먼드에게 파우누스인 툼누스씨가 말해 준대로 이렇게 이야기해준다.
“아주 끔찍한 사람이야. 여왕 자격이 전혀 없는데도 스스로 나니아의 여왕이라고 부른대. . . . 착한 이들은 너나없이 그 여자를 몹시 싫어한대. 마녀는 사람들을 돌로 변하게도 하고 온갖 무시무시한 짓을 할 수 있대. 그리고 마법을 써서 나니아에 겨울만 계속되게 했다나 봐. 크리스마스도 없는 겨울 말이야. 마녀는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마법의 지팡이에 금관을 쓰고서 주위를 돌아다닌다지?”
이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하얀 마녀는 겉모양만 보면 비속할 정도로 화려한 왕으로 등장하지만 비열한 마법의 술수를 써서 자기를 적대시하는 것들을 모조리 석상으로 만들고 크리스마스도 없는 나니아 나라를 겨울로 만든 악의 화신으로서, 파괴 질서를 대표하는 흉측한 존재다. 이 악마에게 에드먼드가 걸려든다.
이 작품에서 사자 아슬란은 악마에게 걸려든 에드먼드를 살려내기 위해 수난을 자청하게 되는 것이다. 하얀 마녀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아슬란을 겹겹이 에워싼 채 발로 차고 때리며, 침을 뱉고 비웃어댔다. 아슬란은 조롱과 모욕 끝에 십자가를 대리한 돌 탁자 위에서 하얀 마녀의 칼에 맞아 죽는다. 마녀는 칼을 내리치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자, 누가 이겼지? 얼간이 같은 놈, 네가 이런다고 그 배신자 놈을 구할 수 있을 성싶으냐? 이제 나는 계약대로 그놈 대신에 널 죽일 것이고, 그리하여 심오한 마법은 그대로 지켜질 것이다. 하지만 네가 죽으면 내가 그놈을 죽이지 못할 것 같으냐? 그 다음에는 누가 내 손아귀에서 그놈을 구해 내겠느냐? 넌 내게 나니아를 영원히 넘겼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너는 네 목숨은 물론이고 그놈의 목숨도 구하지 못하게 된 거야. 그런 줄이나 알고 절망하면서 죽어라.”
마녀는 자기가 진정한 승리자라고 믿고 있으나, 태초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존재로서, 그녀는 전능자의 섭리 같은 것은 전혀 알 수가 없다. 이 악의 질서는 종국적으로는 선의 질서에 종속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파괴적인 질서를 대리하는 마녀에게 타락한 인간의 대리자 에드먼드가 유혹에 넘어지게 된다.
에드먼드는 하얀 마녀의 덫에 걸려들기 전에 이미 도덕적으로 타락되어 있었다. 우선 순수한 진실과 선의를 거짓과 악의로 바꾸어 못된 짓을 하게 되었었고, 쉽게 악의 선동과 감언이설에 넘어가 자만과 탐욕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하얀 마녀가 보장해준 왕이라는 권세를 가지고 가문의 장자인 형 피터를 좌지우지해 보겠다는 그의 반항적 본성까지 발휘하게 된다. 아슬란의 추종자인 비버 씨 부부가 페번시가의 아이들에게 ‘아슬란이 오고 있다’는 말을 했을 때, 다른 형제자매들과는 달리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 이것은 에드먼드의 불신에서 연유된 감정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하얀 마녀의 유혹에 쉽게 넘어지고 만다. “실제로는 하얀 마녀가 사악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마음 깊이 알고” 있었지만, 그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처럼 마녀가 그렇게 사악할 리는 없다고 스스로 정당화 한다. 이 정도로 에드먼드는 도덕적으로 타락했었다. 그래서 그는 거짓말쟁이의 앞잡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2. 우주의 질서를 총괄하는 구원자 아슬란
이슬란은 흔히 어린 양으로 비유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물 사자다. 루이스는 아슬란을 사자로 만든 까닭을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의 사자로 불리며 사자는 백수의 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나니아 나라가 말하는 동물의 세계니까 예수가 인간의 세상으로 오실 때는 인간의 모습으로 와야 하지만, 동물의 세계로 올 때는 동물의 모습으로 와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아슬란은 하얀 마녀를 물리칠 수도 있었지만 모든 타락한 인류의 대리자인 에드먼드를 살리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마녀에게 굴복하고 만다. 아무런 반항도 없이 털 깎이고 수치와 조롱당하며 마녀의 칼에 맞아 죽게 되는 것이다. 그 굴욕적인 장면을 루이스는 모두(冒頭)에 실은 묘사와 더불어 이렇게 묘사했다.
“아슬란이 판판한 돌 위에서 다시 꽁꽁 묶이자 그 무리는 침묵에 휩싸였다. . . . 마녀는 전날 밤 에드먼드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슬란 앞에 맨팔을 드러내더니 칼을 갈기 시작했다. . . . 드디어 마녀가 아슬란의 머리 옆으로 다가가 섰다. 마녀의 얼굴은 엄청난 흥분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아슬란은 분노나 두려움 따위는 전혀 없이 약간 슬픈 표정으로 평온하게 하늘을 우러러볼 뿐이었다.” 우리 성도들이 믿는 바와 같이, 아슬란은 죽음으로 끝나는 영원한 패배자는 아니다. 아슬란은 십자가의 보혈을 지나 부활로 나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시 살아난다.
아슬란의 처형장에 모였던 무리들이 다 사라지고 숲이 다시 잠잠해지자 수잔과 루시는 탁 트인 언덕 꼭대기로 기어 올라갔다. 결박당한 채 쓰러져 있는 사자의 차가운 입에 입을 맞추고 펑펑 눈물을 흘리며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려 입에 물린 재갈을 빼내고 꽁꽁 묶여 있는 밧줄을 풀어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적들이 밧줄을 어찌나 꽉 묶었던지 매듭에 손도 댈 수가 없다. 그런데 어디선가 회색 쥐들이 그때 나타나 밧줄을 갉아 없애고 하나씩 하나씩 모조리 끊어냈다. 여기서 쥐들은 왕성한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자연적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온 나라가 짙은 잿빛에 휩싸여 있었지만 그 너머로 저 멀리 어슴프레한 바다가 눈에 들어왔고, 하늘은 붉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사자로 표상되는 예수께서 부활하는 아침이었다. 마침내 동틀 무렵 아이들은 제단과 무덤의 상징인 돌 탁자가 쩍 갈라져 두 동강이 나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곳엔 아슬란이 없었다.
아슬란의 부활과 함께 마법에 걸렸던 석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죽음 같은 정적은 사라지고 행복에 겨운 동물들 세계에 생명과 활기로 넘치기 시작했다. 이제 아슬란과 루시와 수잔은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며 함께 털과 팔과 다리를 포개고 뒹굴었다. 나니아가 아닌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맛볼 수 없는 장난이었다. 신기하게도 루시와 수잔은 전혀 피곤하거나 배고프거나 목마르지가 않았다. 이런 체험이야말로 천국에서나 맛볼 수 있는 그런 일체감에서 오는 황홀함이라 할 수 있겠다. 죄를 회개하고 개과천선한 에드먼드도 정의의 왕이 된다. 에드먼드처럼 우리도 죄를 짓고 좌절하고 절망에 처해 있다 하드래도, 십자가의 보혈을 지나 부활로 나가는 하나님만 믿고 바라보기만 하면 내일의 태양은 다시 떠오르기 마련이다. 부활신앙이 암담한 흑암의 짙은 구름을 걷어내고 그 구름 사이로 소망의 햇살을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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