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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숲을 거닐며 - 10]-로버트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와 “가지 않은 길”

아름다운친구 2013. 4. 24. 00:17

명작의 숲을 거닐며 - 10

인생 나그네 길 우리 모두

바른 선택으로 비뚠 길로 가지 말았으면!

-로버트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와 “가지 않은 길”

조 신 권(연세대 명예교수/총신대 초빙교수)

 

명시에로의 초대

 

1) 이 숲의 주인을 나는 알 것 같다/그러나 그의 집은 마을에 있어./자기 숲에 쌓이는 눈을/내가 여기서 바라봄을 그는 모르리. 2) 나의 작은 말도 이상하게 생각하리라,/근처에 농가도 없는 곳에 멈추는 나를./한 해의 가장 어두운 저녁/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3) 그는 마구에 달린 방울을 한번 흔든다,/무슨 일이 있느냐는 듯이./그 외에 나는 것은/느슨한 바람 따라 눈송이 쓸리는 소리. 4)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허나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내가 잠들기 전 몇 마일을 가야만 한다./내가 잠들기 전 몇 마일을 가야만 한다.

1) Whose woods these are I think I know./His house is in the villiage though;/He will not see me stopping here/To watch his woods fill up with snow. 2) My little horse must think it queer/To stop without a farmhouse near/Between the woods and frozen lake/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3) He gives his harness bells a shake /To ask if there is some mistake./The only other sound's the sweep/Of easy wind and downy flake. 4)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But I have promises to keep,/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위에 초대된 4연으로 구성된 시는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자연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5-1963)의 작품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의 전문이다. 이 시에 붙여진 번호는 연(stanza) 표지이고 사선(/)은 시행을 바꾸라는 표지이다. 먼저 프로스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생애와 작품

 

로버트 프로스트는 20세기 미국 시단에서 가장 두드러진 시인으로서 1875년 3월 26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부부 교사였는데, 아버지는 그가 10세 때 사망했고, 그의 모친은 프로스트와 함께 고향인 매사추세츠 주로 돌아와 그의 친할아버지가 살고 있던 로렌스에 정착했다. 프로스트는 17세 때에 더트머드 대학에 입학했으나 몇 달도 안 되어 중퇴하고 말았다. 20세 때 고등학교 동기 동창인 화이트(Elinor White)와 결혼했고 이어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으나 여기서도 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중퇴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시골 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고 구두를 만들어도 보았으며 결국 1900년에는 뉴햄프셔 주의 데리라는 곳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1년 후에 그는 농사짓는 일을 그만두고 가족을 이끌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그는 시를 쓰면서 문인들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때 ?소년의 의지? (A Boy's Will, 1913)와 ?보스턴의 북쪽? (North of Boston, 1914)을 출판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유럽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그는 가족을 데리고 다시 뉴햄프셔 주의 프랜코니아(Franconia)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보스턴의 북쪽?의 미국판이 출판되면서 그는 갑자기 크게 명성을 얻어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16년에는 앰허스트 대학의 주재 시인(Poet in Residence)이 되었고 이어 예일, 미시간, 더트머드, 하버드, 웨슬리 대학 등에서 시를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구수한 음성과 전원적인 그의 시는 인기를 모았고 계속하여 그는 시집을 발간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풀리쳐 상을 탔다. 67세 때에 ?표지의 나무? (A Witness Tree)를 발간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해가 갈수록 노쇠 하는 것이 아니고 좀 더 지혜롭고 확고해져 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1957년 즉 그가 83세 때에 그는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등을 포함한 여러 대학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1년에는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작시 “모조리 바친 것”(The Gift Outright)을 낭송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의회훈장(Congressional Medal of Honor)이라는 최고 훈장을 받았고, 이어 미국 국무성의 친선 사절로 소련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다음해 즉 1963년에 그는 영광 속에서 그의 일생을 마쳤다.

숲과 마을 사이에서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라는 시는 너무나 잘 알려진 시로서 아주 쉬워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는 시지만 실상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이 시는 1923년에 처음으로 『뉴 리퍼블릭』지에 발표되었다가 그 해 『뉴 햄프셔』(New Hampshire)라 명명한 로버트 프로스트 시 모음집에 재수록 되었다. 이 시 모음집으로 프로스트는 미국시인으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풀리쳐 상까지 받았다. 이 시는 프로스트가 뉴 햄프셔의 북서부 모서리에 있는 프랜코니아마을에 살고 있을 때 쓴 것 같다. 프랜코니아 근처에는 숲이 있는데, 그 숲의 아름다운 자연풍경이 프로스트에게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프랜코니아 지방은 연중 12월 21일 또는 22일 경이 가장 어두운 시간이 긴 동지(冬至)가 된다.

이 시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화자 또는 나레이터로 등장하는 한 사람이 시골 길로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그 마차를 멈추고 숲에 쌓인 눈을 살피고 있다. 이 사람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가 없다.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으나 시적 정황으로 볼 때 여자라기보다는 남자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아니 인생길을 걸어가는 일반적인 나그네를 대신하는 보통 사람일 수도 있다. 화자가 어떤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작은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동지섣달 가장 어두운 밤에 뚜렷한 목적도 없이 눈 나리는 숲가에서 발을 멈추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 신분조차 뚜렷하지 않고 돈도 없으며 매우 어렵게 사는 소외계층의 평범한 보통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그렇게도 추운 겨울 저녁에 한가롭게 눈 나리는 숲가에 머물러 서서 여유 있게 저녁 정취와 로망 및 감상에 젖는다고 하는 것은 그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구에 작은 방울을 단 작은 말까지도 머리를 흔들어 방울 소리를 내어 주인이 왜 그런 곳에 멈춰 섰는지를 알지 못하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이 숲의 주인은 마을, 아마도 도시에 살고 있어서 자기가 이 숲에 쌓인 눈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사실조차 전혀 알지 못할 것이라 한다. 이 사실로 보아도 이 나그네의 신분 자체가 도시에 살고 있는 이 숲의 주인과는 차이가 나는 소외계층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연을 보면 이 숲의 위치는 농가조차도 근처엔 없는 먼 외딴 곳이고 날씨는 호수를 얼릴 만큼 혹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어는 ‘어두운’(dark)이라는 컬러 이미지인데, 이 말은 문자적인 의미 이외의 다른 의미를 형상화해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여러 정경으로 미루어 보건대 나그네는 심신이 피곤하고 살기 어려워 심하게 좌절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암담하고 암울한 심적 상태를 반영해 주는 단어가 ‘어둡다’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 충동적으로 ‘죽음’을 생각하며 자살 의도를 품고 이 눈 나리는 숲가를 찾아왔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삶이 너무 핍절하고 어려우면 누구라도 자살을 생각해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3연에서는 숲의 소리에 매려 되어 잠깐 동안 그 속에 흡수되어 지내기를 바라지만, 곧 그 침체된 심신이 자연의 힘에 의해 회복되면서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렇게 제자리로 돌아온 나그네에게 있어서 말방울소리, 바람 부는 소리, 눈송이 쓸리는 소리는 도시의 소음에 비해 대조적으로 조용하고 부드럽고 온화하며 다정하다. 자연은 냉정하고 잔인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화자가 느끼는 것처럼 부드럽고 다정하고 우호적일 수도 있다. 숲과 쌓인 눈, 방울소리와 바람소리 등이 아우러져서 드러내는 자연의 조화와 어둠과 눈·바람의 미묘한 조음과 함께 임재하는 하나님과 접촉되면서 나그네는 자살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4연에서는 이렇게 자연의 생명에너지와 접한 나그네는 잠깐 동안의 충동적인 유혹에서 벗어나 다시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가야할 길이 아직도 남아 있고 지켜야할 사회적인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허나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내가 잠들기 전 몇 마일을 가야만 한다./내가 잠들기 전 몇 마일을 가야만 한다.” 이 마지막 연이 이 시의 백미다. 나그네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숲과 잠들기 전에 곧 죽기 전에 하여야 할 사회적인 의무와 책임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인간의 의무와 책임에 곧 그의 사회적인 소명에 더 무게를 두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탕자처럼 집을 떠날 수도 있지만 돌아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이 때로는 피곤하고 좌절을 겪을 때면 아름다운 자연과 죽음 안에 도피하고자 하는 충동을 받을 수도 있지만, 시간을 벌어 여유를 갖고 사회적 소명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면 자살을 포기하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올 수가 있다. 살다보면 때로 눈 나리는 숲가를 찾아가고자 하는 낭만적 충동과 자살심리에 빠질 수도 있지만, 따사로운 사회적인 관계 끊고서는 존재의 의미와 존속의 가치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하여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회적인 소중한 관계는 귀하게 여겨져야 하고 그 관계지킴이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의무요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노란 숲 속으로 갈라져 있는 두 길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라는 시와 마찬가지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시도 인생의 길 선택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하는 시다.

 

1) 두 길이 노란 숲 속으로 갈라져 있어/아쉽게도 두 길을 한꺼번에 갈 수 있는/한 나그네가 아니기에, 나는 오래 서서/한 길이 덤불로 꺾이는 데까지/할 수 있는 한 멀리 바라보았네. 2) 그러다가 매한가지로 아름답고/풀이 우거지고 밟히지 않았기에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딴 길로 들어섰지,/설령 그리로 지나감으로써/정말 똑같은 정도로 밟힐 테지만. 3) 그날 아침 그 두 길은 모두/검게 밟은 자취 하나 없는 낙엽에 덮여 있었네./처음 길은 다른 날로 미루어 두었지!/그러나 길은 길로 이어진 것이기에/다시 돌아올 가망은 없었지. 4) 나는 이 이야길 먼 훗날/어디선가 한숨지으며 말하게 되리라,/두 길이 숲 속에서 갈라져 있어, 나는/결국 덜 다닌 길을 택하였고,/그리고 그것이 큰 차이를 만들었노라고.

로버트 프로스트는 많은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시인이다. 쉬워서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그의 시에 감도는 인생의 달관(達觀), 미국의 그 대륙의 풍모(風貌)와도 같은 광막하고 고답적인 관조가 오히려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서는 노경에 든 시인의 커다란 관조적 표현이 더욱 감동적이다. 여기 배경으로 펼쳐진 숲속의 길은 반드시 사람이 발을 대는 길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숲 속에 난 길은 가시적인 길을 통하여 인생에서 걸어온 길이라는 좀 더 포괄적인 길에 대해 성찰을 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생이 살아가는 길, 잘났으면 잘난 대로, 못났으면 못난 대로 꾸준히 걸어가는 인생의 길, 누구에게나 펼쳐진 그 인생의 길을 뜻한다. 시인은 나이가 들어 그 인생의 길을 지그시 눈을 감고 되돌아보는 후련한 체관(諦觀)이 묘사되어 있다.

인생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으로 인하여 웃고 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길은 ‘노란’ 숲 속으로 갈라져 있다. ‘노란’색은 ‘기쁨’, ‘따스함’을 표상하는 동시에 ‘망설임’과 ‘회의’를 상징하기도 한다. 한 길은 선택하는 자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지만 다른 길은 용기로써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노란’색으로서 표현하였다. 인생은 자기의 길을 자신의 엄격한 가치관으로 선택할 수도 있고, 아니면 누구의 권에 못 이겨 취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며, 자신도 모르게 그리로 발을 옮기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우리 인간은 두 길을 한꺼번에 택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우리 인간은 다 유한하고 절대적인 선택을 할 수 없는 실존이기 때문에 보다 그것이 나을 것이라고 하는 가정과 가능성을 기준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한 길밖에 선택할 수 없는 한계 때문에 맛보게 되는 아픔이 있다.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호기심과 망설임이 두 길 중 하나만을 선택하여야 한다고 하는 기로에 담겨져 있다. 그러나 그것이 좋든 궂든 내가 택한 길이 때문에 자기 자신이 책임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잘 선택하여야 한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그 길에서 딴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이가 들면 그 길의 선택에 대해 잘잘못을 캐려 들지 말고 이미 흘러간 것으로서 멀리 두고 바라보는 것이 좋다. 프로스트가 그러했기 때문에 독자들을 매혹시킨다. 프로스트는 남들이 다 간 그런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즉 그가 선택한 길은 평탄하고 평이한 그런 길이 아니었다. 한 길을 선택하면 다른 한 길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생을 두 번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단회적이다. 그러므로 선택이 중요하다. 프로스트에 따르면 어떤 길을 선택하던 나중엔 한숨지으며 말하게 되고 후회하면서 되돌아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 한 길을 선택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 하드라도 너무 따지지 말고, 그렇다고 애써 자책도 하지 말고 주어진 그 길에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인생의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서 방관자보다 보기 싫고 얄밉고 비열한 자는 없다. 방관자라는 것은 마치 강의 동쪽 언덕에 서서 서쪽 언덕의 화제를 구경하면서 그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즐거워하는 자와 같고, 이 쪽배를 타고서 저 쪽배가 침몰하는 것을 구경하면서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좋아하는 자와 같다할 것이다. 이 얼마나 얄밉고 비열한 처사인가!

프로스트는 “들어오라”는 시의 마지막 연에서 들어와 안주하라는 요청도 안 받았지만 받았다 하더라도 “나는 밖에서 별을 보겠다/들어가지 않겠다”라고 노래하였다. 책임의식을 갖고 나의 인생과 사회를 위한 무엇인가를 해보겠다고 하는 성취동기를 가졌다는 것이다. 별을 보겠다는 성취동기가 있어서 그는 별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다. 성취동기는 무엇인가를 이루어 보려는 욕망이다. 가치 있는 일을 성취하려는 의지다. 책임의식이 강하고 성취동기가 뚜렷하면 그 사람은 보람 있게 행복하게 일을 성취해 내며 살아갈 수가 있다. 바른 선택과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의식 및 전심전력 투구하는 정신이 인생을 승리로 이끈다. 책임을 진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자면 지성일관(至誠一貫)을 의미한다. 마치 야구 선수가 공을 던질 때 전력을 다해 던지는 것처럼 인생도 그렇게 정성을 쏟아 사라야만 한다. 그러면 자만이 비뚠 길로 가지 않고 많은 수확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