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숲을 거닐며 -6
삶을 젊고 보람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늘 배우며 살았으면!
-샤를르 드 푸코의 “나는 배웠다”
조 신 권(연세대 명예교수/총신대 초빙교수)
∥명시에로의 초대∥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임을.
사랑을 받는 일은 그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다.
I've learned that you can't make someone love you.
All you can do is to be someone who can be loved.
The rest is up to them.
나는 배웠다,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그것을 무너뜨리는 데는 한 순간이면 된다는 것을.
I've learned that it takes years to build up trust
and only seconds to destroy it.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은 15분을 넘지 못하니,
그 다음은 서로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I've learned that you can get by on charm for fifteen minutes.
After that, you better know something.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치에 나를 비교하기보다는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에 비교해야 한다는 것을.
I've learned that you shouldn't compare yourself to the best others can do,
but to the best that you can do.
나는 배웠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I`ve learned that it's taking me a long time
to become the person I want to be.
위에 인용한 명시구는 '나사렛 예수'를 극진히 사랑했던 사하라의 성자라고 불리는 19세기 프랑스의 수사 샤를르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1854-1916)의 작품, “나는 배웠다”(I've learned)라는 긴 시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오마르 워싱턴(Omar Washington)이라고 하는 메카 출생의 아라비아 시인이 원작자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나는 워싱턴보다는 샤를르 드 푸코가 더 작자로서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생애를 먼저 살펴보겠다.
샤를르 드 푸코의 생애
샤를르 드 푸코는 1858년 9월 18일, 프랑스의 엘자쓰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5살 때 5개월 간격으로 부모를 차례로 잃었는데, 그 당시 여동생 마리는 3살이었다. 그들은 늘 자애로운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자라났다. 14살 때, 샤를르는 경건하게 첫 영성체를 받았다. 그러나 곧 그릇된 사조의 영향을 받아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완전히 신앙을 잃었다.
신앙을 잃으면서부터 샤를르는 점점 게을러지고 살이 쩌 갔다. 간신히 김나지움에 합격한 그는 아무런 목표도 없이 공허하고 무관심한 가운데 파리의 한 예수회 학교에서 군인이 될 준비를 했다. 17살 때 그는 신앙심도 없고, 이기주의와 그릇된 욕망밖에 없었다. 18세 때, 그는 유명한 사관학교에 들어가 2년을 보냈다. 20세가 되어 성년이 되고 젊은 백작이 된 그는 대단히 큰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고, 곧 기병 학교로 옮겼다. 그는 기품이 있어 보이고 교육도 잘 받았으나 경박하였고 오로지 즐겁게 지내는 일에만 마음을 썼다.
1880년 말, 그가 속한 연대는 알제리로 배치되었다. 샤를르는 애인인 미미를 데리고 갔고 아무 거리낌 없이 어디든지 부인처럼 데리고 다녔다. 결국 그는 부도덕한 행동과 계속된 방탕한 생활로 연대에서 쫓겨났고, 1881년 3월 미미와 함께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밀려드는 공허감에 질식할 것만 같았던 그는 공허감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화려한 생활에 탐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연대가 알제리 남 오랑의 큰 전투에 휘말려 들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게 된 그는 그들을 돕기 위해 일말의 주저도 없이 서둘러 그곳으로 떠났다. 그의 행동에 모두가 놀랐으나 그는 지휘관으로서 온 힘을 다해 부하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그 이후 샤를르의 마음을 특히 사로잡은 것은 아프리카의 모로코였다. 그는 어떤 유럽인도 그때까지 가보지 못했던 모로코를 향해 탐험 여행을 떠났다. 그는 랍비 요셉 알레망으로 변장하고 실제로 일 년 동안 모로코를 두루 여행했다. 1888년 샤를르가 자신의 소명을 인식하게 된 결정적인 세 가지 일이 일어났는데, 첫 번째가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므로 일찍이 그 어떤 인간도 그보다 더 내려갈 수는 없다”는 유블랑 신부의 강론이었다. 그 말은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 언제나 가장 높은 자리를 추구해왔던 샤를르의 영혼에 깊이 각인되었다. 두 번째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곳의 가난한 생활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마지막은 성지 순례를 갔을 때였다. 예루살렘 성지를 3개월간 여행하면서 그는 나사렛 예수의 삶처럼 눈에 띄지 않고 단순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확고해졌다.
1890년, 샤를르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1901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 이후, 가장 버림받은 사람을 찾아 사하라 사막의 베니아베스와 타만라셋으로 가서, 헐벗고 가난하며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눈코 뜰 사이 없이 일을 하였다. 1902년 그는 전교 주교에게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잠시도 책을 읽거나 묵상할 시간을 가질 수 없을 만큼 바깥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병사들이 끊임없이 나를 찾아옵니다. 매일 20명의 노예들이 그들을 위해 세운 작은 집을 채웁니다. 30명에서 40명에 이르는 방문객들이 여기에 옵니다. 15명분의 약을 나누어주는데 걸인들이 75명에 이를 때도 있고, 어린이가 60명에 달할 때도 있습니다. 매일 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와 아침식사를 제공받는 손님들도 있습니다.”
1904년 샤를르 신부는 선교사로서 사하라에 갔다. 사하라 사막을 행군하던 한 병사는 이렇게 보고한다. “아침 5시부터 기온이 섭씨 40도에서 50도를 넘나든다. 낮에는 8리터에서 1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행군 2시간 후쯤이면 모두들 말을 타고 있다. 그러나 신부님은 손가락으로 묵주알을 굴리면서 완전히 지칠 때까지 언제나 빠른 속도로 걸어서 따라왔다.”
그리고 그는 남 알제리 여행에서 처음으로 투아레그족을 만났다. 그들은 회교(이슬람교)를 믿는 유목민들이었고 순수 혈통의 바르바리인이며 산악지대 호가르 지역의 지배자였다. 그들의 기품있는 얼굴과 큰 키가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1905년부터 11년 동안 그들과 함께 ‘원주민’으로 살다가 거기에서 죽게 된다. 샤를르 신부는 오랫동안 투아레그족의 언어와 문화를 연구한 덕분에 "그는 우리말을 우리보다 더 잘 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또한 그는 앞으로 올 선교사들이 쉽게 일할 수 있도록 그들의 시를 2,000개 이상 모으고 연구하여 사전을 만들었다.
1907년 여름, 지칠 대로 지친 샤를르 신부는 사촌 누나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17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나이를 실감합니다. 나는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어려움을 자신의 일기장에 털어놓았다. “미사를 드릴 수 없다. 나 혼자이기 때문이다. 비관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누군가 오리라 희망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한 명의 그리스도인 여행자도, 한 명의 군인도, 혼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다는 허가도 오지 않았다. 1년 만에 처음으로 성탄 전야 미사를 드릴 수 없었다!”
고행과 은거를 통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영적인 가치를 찾으면서 사막에서 모슬렘들과 함께 하던 샤를르는 불행히도 원주민에게 살해되었는데, 그 해가 1916년이었다. 사막에 뿌려진 그의 피는 은자들의 고통스런 소명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의 말년에 아버지 하나님께 자기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문과 더불어 이 “나는 배웠다”라고 하는 장시를 쓴 것으로 추정한다. 아니면 투아레그족의 시 2,000개를 모으면서 개작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경우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매우 감동적이고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시이므로 전문 번역시를 여기에 옮겨둔다.
나는 배웠다
1)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임을. /사랑을 받는 일은 그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다./나는 배웠다, 많은 배려를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2) 나는 배웠다,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그것을 무너뜨리는 데는 한순간이면 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인생에선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보다/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3)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은 15분을 넘지 못하니,/그 다음은 서로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이할 수 있는 최대치에 나를 비교하기보다는/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에 비교해야 한다는 것을.
4) 나는 배웠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보다/그 일에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나는 배웠다,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내도 /거기엔 늘 양면이 있다는 것을.
5) 나는 배웠다,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사랑하는 사람에겐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놓고 떠나야 함을./나는 배웠다, 더 못 가겠다고 포기한 뒤에도 /훨씬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
6) 나는 배웠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을./나는 배웠다, 깊이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드러낼 줄 모르는 이가 있다는 것을.
7) 나는 배웠다, 내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남을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다는 것을./나는 배웠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정이 계속되듯 /사랑 또한 그렇다는 것을.
8) 나는 배웠다, 가끔은 절친한 친구도 어느 순간 한 번은 /나를 아프게 하지만, 그래도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나는 배웠다, 남에게 용서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9) 나는 배웠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 해도 이 세상은/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나는 배웠다, 사람이 다툰다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며/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10) 나는 배웠다, 때론 남보다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나는 배웠다, 두 사람이 한 사물을 보더라도 관점은 다르다는 것을./나는 배웠다, 결과에 상관없이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결국 앞선다는 것을.
11) 나는 배웠다, 친구가 도와달라고 소리칠 때 없던 힘이 솟는 것처럼/자신의 삶이 순식간에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나는 배웠다, 글 쓰는 일이 대화하는 것처럼 /아픔을 덜어 준다는 것을.
12) 나는 배웠다, 가장 아끼는 사람이 /너무 빨리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나는 배웠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과/내 주장을 분명히 하는 것을 구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13)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 받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평생 배우며 살았으면!
산다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일하는 것이다. 열심히 배우고 사랑하고 일하는 사이에 육십이 되고 칠십이 되며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지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죽는 날까지 배우고, 사랑하며, 진리를 탐구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자기완성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게 된다. 언제나 우리는 성실의 면류관을 쓰고, 근면의 구두를 신고, 겸허의 허리띠를 띠고, 80평생 일생일업(一生一業)의 정신을 갖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결국은 한 걸음 한 걸음 배워가는 과정이요 구원의 성취를 위해 전진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배우는 마음은 언제나 겸손한 마음이요 늘 비어 있는 마음인 것이다. 무엇이나 참되고 가치 있으며 바른 것으로 채워 넣으려고 애쓰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일에 몰입하는 때는 언제나 청청하고 희망차며 싱싱하기만 한 청춘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배움을 박차버리고 등을 돌리는 순간부터 노쇠와 불안과 적막함이 깃들기 시작한다.
글을 배우고 책을 읽는 것만이 곧 인생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배움의 소재는 학교에서 하는 교과서에 있거나 도서관에 쌓인 책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에 눈을 뜨고 인생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와 고진감래(苦盡甘來)를 알게 되는 것은 긴 인생길을 걸어가면서부터이다. 배우는 마음을 가졌을 때 모든 환경과 우주 전체가 배움의 소재가 된다.
주자(朱子)의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에 “권학문”(勸學文)이라는 시가 나온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 學難成)이라! ‘젊은이여! 세월은 당신을 쉽게 늙게 한다. 그러나 배움의 길은 참으로 어렵구나!’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 不可輕)이라! ‘지금 내가 맞이한 이 순간, 절대로 가벼이 넘기지 마라!’ 미각지당춘초몽(未覺池塘 春草夢)이라! ‘지난 봄 저 연못가에 피었던 꽃을 느끼기도 전에’, 계전오당기추성(階前梧葉 已秋聲)이라! ‘계단 앞 오동나무 잎은 떨어져 가을을 알리누나!’ 정말 시간은 빠르게 지나고 배움의 결실을 이루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는 뜻의 시다. 어쩌면 배움은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 시점이 가장 빠른 시간일 수 있다. 동양에 있어서 사람에 대한 평가기준은 그 사람의 지위나 부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배움에 몰입하는 가에 있었다. 그래서 죽을 때 까지 책과 인생을 놓지 않고 배움을 이어가는 것을 인간으로서 가장 존엄하고 위대한 모습으로 보았던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이런 “권학문”과 같은 시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배움의 열정’이 결여된 자아를 자성해보아야 한다. 감정에만 치우치거나 흥분에만 매달리지 말고 지식에 있어서도 정진하고 배우는 일에 뜻과 정성을 모아 힘쓰며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렇게 보배로운 배움을 익혀서 열심히 섬기며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크리스천들이 지향하는 최고의 모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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