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안에서♡/말씀...오늘의 묵상

‘빗나간 성실’의 대명사, 유다여!

아름다운친구 2007. 4. 3. 18:05

2007년 4월 3일 화요일
‘빗나간 성실’의 대명사, 유다여!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요한복음 12:6)

  소설이나 연극, 영화 등 예술 분야에서 예수님을 판 제자 가룟 유다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품들이 제법 있습니다. 혁명 의식을 가진 투사쯤으로 유다를 평가하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다를 가리켜 ‘도둑놈’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상상도 좋지만 성경에서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는 사실에 더욱 권위를 두어야 합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상상을 해 봅니다.

  유다는 계산이 밝고 똑똑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에게 회계의 역할을 맡겼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소외된 변두리인 갈릴리 지방 출신인데 유다만 팔레스타인의 중심지인 유대지방 출신이었던 점도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요한에 따르면 유가 제자 공동체의 돈궤에서 일부를 착복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조금씩 빼내어 쓰다가 그것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3백 데나리온이나 나갈 향유를 예수님께 붓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팔아 헌금했다면 구멍 난 장부를 정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게 향유를 예수님께 ? 刮儲嗤??그렇게도 화가 난 것입니다.

  어쨌거나 유다는 스승 예수를 은 30개에 팔았습니다. 그가 돈이 필요했음은 대제사장과 흥정하는 과정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마 26:15상). 자기가 꺼내어 쓴 돈 궤를 메우려는 빗나간 ‘성실’을 위해 스승마저 팔고 맙니다. 얼마나 극심한 아이러니입니까? 이런 왜곡된 정직함을 보였던 유다는 결국 자신을 용납할 수 없어 자살합니다. 이것도 역시 유다가 보여주는 빗나간 성실의 증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성실하게 하옵소서. 빗나간 열정은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헌신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By 원용일 목사

2007년 4월 3일
말로 하는 전쟁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사 58:9

이사야는 말의 실제적 능력, 특히 말의 억압하는 능력을 잘 이해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억압을 제거하려면 우리의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그는 가르칩니다. 말은 힘이 있습니다. 억압은 행동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우리는 아주 깊은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종차별주의가 말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게 됩니다. 적(敵)들에 대하여 악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그들에게 악하게 행동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1990년대 초반에 전쟁의 참상이 벌어지기 전 몇 달 동안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에 살았던 사람들은 “먼저 언론과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야기되던 것들이 결국에는 전쟁터에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라고 증거했습니다.

이미 당신이 무가치한 존재들이라고 규정했던 사람들을 죽이고 불구로 만드는 일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죽이고 불구로 만드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폭력적인 말은 폭력적 행동의 씨앗입니다. 억압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억압의 뿌리가 되는 것, 즉 혀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주위 사람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로 그들에게 실제적인 피해를 끼쳤습니까?
아버지, 총이나 주먹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로 무장된 혀를 사용한 폭력의 죄를 범한 것을 용서하소서. 사람을 자물쇠나 쇠창살로 가두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로 가둔 억압을 용서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