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말씀:고린도전서 13:8-13
우리는 지난 주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살펴봤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은사를 주신 것은 주님의 몸을 세워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큰 능력을 행하고 많은 은사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을 때 서로 다투고 미워하게 됩니다. 그로인해 주님의 몸을 세워가기보다 도리어 허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모해야 할 가장 큰 은사는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절에 보면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 사도가 성도의 온전함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성도의 온전함이 무엇인지 배우고, 그 온전함을 덧입어 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 6:6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아무리 육적인 노력을 하여도 육으로 난 것이 영으로 바뀔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결단과 결심으로도 안 됩니다. 선행이나 고행이나 금식으로도 육이 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고전 15:50). 그러면 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입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의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책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책을 보아도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성경책에 기록하여 놓았다고 해서 그 성경을 인간이 스스로 읽고 해독하여 영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박사가 성경을 잘 풀어서 전한다고 하여도 성경을 잘 풀어 해석하는 능력으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예수님께서 이루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셔서 자기의 몸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나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이나 반드시 나타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를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2-14절을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에 속한 사람을 우리는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습니다. 성령의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인데 그런 일이 미련하게 보일뿐 아니라 깨닫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도들이 전한 것은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가르치신 것을 전하는 것이기에 동일하게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복음을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며, 그렇게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봉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문제는 은사를 받고나서 자기들이 받을만한 무슨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처럼 자랑하고 교만하여진 것입니다. 그로인해 다툼과 분쟁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왜 은사를 주셨는가를 알게 하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12-14장까지 긴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은 계시를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그 계시의 분명히 하게 함이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주님께서 지금도 자기의 몸된 교회를 친히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사랑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가장 좋은 길을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합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여 집니다. 그러면 무엇이 온전합니까? 우리가 이미 고린도전서 8:1절 말씀에서 보았습니다만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제일 좋은 길이며, 온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것이 오면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특징과 속성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9-11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여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 때는 어린아이 때의 것만 알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버려야할 어린아이 때의 일이 무엇입니까?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이나 여러 가지 은사들이 어린아이의 일입니다. 참으로 이 말씀은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고 하는 이런 일을 어떤 일이라고 합니까? 장성하고, 성숙하고, 높은 차원의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러한 일은 우리가 버려야 할 어린아이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로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고 하는 이런 능력의 역사가 어린아이의 일입니까? 그러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러한 일이 장성한 사람이 되면 버려야 할 어린아이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성령 운동하는 사람들의 말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예언하고, 방언하는 것들을 장성한 일이고, 온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과 정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말을 따라 소위 은사주의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이 어린아이의 일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린아이의 일이 아닌 온전한 것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2:31절에서 바울 사도가 제일 좋은 길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사랑이 없으면 어떤 능력을 행하여도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전 재산으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절을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우리가 실천해서 온전하여 지는 것입니까? 그 사랑을 받아서 온전해 지는 것입니까? 사랑을 받아서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속성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온전한 것이 온다’고 했는데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결론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온전하다는 것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온전하다’는 것을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계시의 온전함을 말하고 있고,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것이 다 온전해 집니다. 그 때에는 불신자도 명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얼굴을 마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말씀은 계시의 완전성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시가 계속 주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책이 수 만권이 되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시대에 계시가 완성되기까지를 온전한 것이 오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계속하여 계시가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신사도 운동을 하는 자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중세 로마 카톨릭은 교황의 말이 성경과 동등하고 교회의 전통이 성경과 동등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만이 계시가 아닌 것입니다. 그 결과 온갖 우상숭배가 가득하여졌습니다. 이러한 중세교회에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개혁을 하고 나온 것이 바로 개신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이 과연 성경만을 계시로 믿고 있습니까? 성경은 단지 참고서일 뿐입니다. 무엇을 진짜계시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까? 심판받아 망할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계시 받은 증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온전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사람들의 성공사례 간증이나 이상하게 보았다 들었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목사들은 어느 교회가 빠르게 성장하는가를 염두에 두고서 그런 성공세미나를 보고 배웁니다. 교인들은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도 받고 세상에서도 성공 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교회에 나옵니다. 그리고 듣는 이야기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십자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흠모할 만한 세상의 영광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엉터리 계시는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근거를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오늘날도 계시가 주어지는 것인 양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은사들은 아직도 부분적으로 계시가 주어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계시가 완성이 되고서는 더 이상의 그런 계시적인 은사들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왔기에 그러한 것들은 폐하여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성경대로 되는 것이며, 천국과 지옥도 성경대로 되는 것입니다. 다른 계시가 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베드로후서 1장에서 더 확실한 예언이 바로 성경의 말씀이기에 너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르기 까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1:19절을 보면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을 이야기 하면서 세상의 보이는 영광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니 복을 주더라고 간증을 합니다. 물론 이들이 말하는 복은 세상적인 것들입니다. 오늘날은 도리어 복음을 전하면 싫어합니다. 말씀의 본의를 전하면 도리어 이상한 교회 취급을 하고 떠나갑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가 정말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이 주님을 사랑합니까?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멸시를 받은 그 십자가를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 역시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멸시를 받는 길입니다. 그런데도 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시겠습니까? 우리가 이 주님을 믿고 따르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다는 그 이루심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 이루심이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없는 곳은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함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것이 올 때에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게 되는데 그 온전함이란 일차적으로 계시의 완성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 계시의 완성이란 무엇을 증거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 이것이 완성이 되는지 우리가 성경을 몇 곳을 보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5: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함을 입어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고 그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즐거워하게 됩니다. 이보다 더한 온전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요한일서 4:16-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 졌기에 심판 날에도 담대합니다. 이렇게 온전한 사랑을 입은 자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의 허물을 덮어줄 수밖에 없고 용서 할 수밖에 없고 오래 참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부분은 지난주의 말씀대로 참으로 회개할 내용들인 것입니다. 그런 곳에 자기 잘난 체 하는 것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 나오더라도 그게 부끄러운 것인 줄 알고 주의 온전함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17-19절을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 가운데서 믿음의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케 됩니다.
오늘 본문 12-13절을 보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모든 것이 희미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폐하여 집니다.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다 폐하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성도의 온전함이 무엇인지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이 온전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날마다 알아가게 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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