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안에서♡/말씀...오늘의 묵상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의미

아름다운친구 2007. 4. 12. 07:16

2007년 4월 12일 목요일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의미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14:8)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主)님을 위해 사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서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문제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자주 들었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1세기 로마 사회의 정황을 고려하면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것은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쉽게 부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면이 있습니다. 1세기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사람들이 ‘주’(헬라어로 ‘큐리오스’)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바로 로마의 시저(=가이사)였습니다. 시저에게만 공적으로 주라는 칭호를 붙이며 존경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세기 당시의 크리스천들은 로마법에 따라 사형을 당해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그를 위해 죽는 것도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크리스천들! 의 이런 태도는 더 이상 시저를 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그런 심각한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거의 위험을 느끼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고 부르기도 하는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세기를 살던 믿음의 선배들의 고민과 결단에 동참할 수 있는가 우리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고백에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도록 오늘도 일터에서 노력합시다. 그런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가장 실감나게 제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을 불러보고 싶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세상에서 주님을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By 원용일 목사

2007년 4월 12일
미움 받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잘못된 것이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10:22

예수님은 사람들이 진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듣기를 싫어하는 것들을 말씀하시는 데 대가(大家)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진리를 외면하여 넘어지려고 할 때 “그것 봐라. 내가 뭐라고 그랬냐?”고 매정하게 말씀하시는 타입은 아니십니다. 주님은 갓 태어난 교회의 일원이 된 사람들에게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를 자세히 말씀하시는 중에 바로 본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앞으로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을 것이고, 심지어 가족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이 주님의 예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을 얻으리라”고 번역된 말은 “안전할(safe) 것이다”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아마도 이렇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투옥되고 고문당하고 두드려 맞고 처형되고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우리가 안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의 교훈들 중 많은 것들은 ‘이미 - 아직 아니’(already - not yet)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이 선포하신 진리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그것의 완성은 미래에 있다는 뜻입니다. 구원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은 “비록 너희가 고난을 당할지라도 나를 위해 끝까지 견디면, 너희의 삶의 모든 부분들에서 온전하여질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데 있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은 아주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믿음과 소망도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망은 하나님이 미래를 바꾸실 수 있다고 믿는 힘이요, 우리가 그분의 손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 능력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당신에게 뭔가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미래의 일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것이 때로는 쉽지 않습니다. 당신이 미래의 어떤 일 때문에 고민스럽다면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어떻게 응답하시는 지를 지켜보십시오.

다툼
주제어 : 성숙, 다툼, 시비
2006-04-12

 

 

때때로 성도들에게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도전들이 오기도 한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듯하게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시비가 그러하다.

 

어쩌면 우리의 자격지심으로 그렇게 느껴지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일의 결과를 보면 일부러 시비를 건 일이 분명한 그런 일들 말이다.

 

그런 시비에 정당하게 따지고 들면 분명 우리의 옳음과 상대편의 그릇됨이 드러나겠지만,

 

그렇게 해서 이겨봤자

 

"믿는 놈이 더해"

 

라고 말하고 가버리면 그는 끝날 일이겠지만,

 

성도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것은 아닌가 하는 찝찝함이 남고 만다.

 

그러고나면 우리는 "내가 좀 더 참을 걸"하고 후회까지 하게 되고..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우리는 다툼은 피하는 것이 비교적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옛 속담처럼

 

괜한 시비는 피하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