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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숲을 거닐며 - 8]-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를 꿈꾸며”와 “아, 해바라기여!”

아름다운친구 2013. 4. 24. 00:05

명작의 숲을 거닐며 - 8

순수를 꿈꾸며 태양을 쫓아가는

해바라기 같은 존재가 될 수만 있다면!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를 꿈꾸며”와 “아, 해바라기여!”

조 신 권(연세대 명예교수/총신대 초빙교수)

 

명시에로의 초대

 

*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려면,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걸머쥐고/한 순간 속에 영원을 간지하여야 하리라.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And eternity in an hour.

* 1) 아, 해바라기여! 시간에 지쳐서,/태양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헤아리며,

나그네의 여정이 끝나는/저 향기로운 황금의 나라를 찾는다.

2)욕망으로 수척해진 젊은이와/눈처럼 하얀 수의를 입은 창백한 처녀가

그들의 무덤에서 일어나 열망하는 나라./그 곳은 나의 해바라기가 가고자 하는 곳이니라.

1) Ah, Sunflower ! weary of time,/Who countest the steps of the Sun;

Seeking after that sweet golden clime,/Where the traveller's journey is done;

2) Where the Youth pined away with desire,/And the pale Virgin shrouded in snow,

Arise from their graves, and aspire/Where my sunflower wishes to go!

 

위에 인용한 시는 영국의 18세기 말의 전기낭만파 시인들 중의 한 사람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순수를 꿈꾸며”(Auguries of Innocence)라는 시의 1-4행과 “아, 해바라기여!”(Ah, Sunflower!)라는, 총 8행 2연으로 된 시의 전문이다. 전기낭만파 시인들로는 로버트 번즈(Robert Burns, 1759-96), 윌리엄 쿠퍼(William Cowper, 1731-1800), 토머스 그레이(Thomas Gray, 1716-71) 같은 시인을 들 수 있다. 이들은 18세기 합리주의 정신이 쇠퇴해 갈 무렵 이성과 규칙보다는 감성과 개성을 더 강조한 시인들이다. 그들은 인간과 자연을 사랑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모험을 좋아했다. 윌리엄 블레이크도 다른 낭만파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슴이 뜨겁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존 웨슬리 형제와 같은 복음주의자들과 윌리엄 쿠퍼나 블레이크와 같은 낭만주의자들에 의해서 부패되고 침체되었던 18세기 영국은 새로운 공기를 호흡할 수 있게 되었으며,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 생기 넘치는 활기를 되찾을 수가 있었다. 블레이크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생애와 작품

 

윌리엄 브레이크는 18세기 말의 영국의 시인이요 유명한 화가였다. 그는 1757년 11월 28일 런던의 양말 공장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 파스(Pars)에 입문하여 소묘를 배웠고, 14세 때에는 제임스 바사이야(James Basire) 의 도제가 되어 그 밑에서 7년간 수업을 받으며 기술을 습득하였다. 블레이크는 초상화나 풍경화처럼 단지 자연에 대한 외관을 복사하는 회화를 경멸했다. 또 일반적으로 보는 무감동한 작품을 부정하여, 대개 이론을 벗어나서 묵상 중에 상상하는 신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14세 때에 판화가의 제자가 되어 고찰(古刹)의 조각이나 중세의 사본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후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25세 때에 결혼했고, 회화면에서는 유화를 꺼려한 반면, 수채화야말로 최고의 표현이라 생각하여 시화집을 만들어 간행했으며, 각 페이지마다 그림을 넣어서 판각화만의 독창적인 색채로 인쇄까지 하였다.

처녀시집 ?소품시집? (Poetical Sketches, 1873) 에서는 아직도 고전주의의 영향을 보이고 있지만, 그 뒤에 이어 자신이 삽화를 그리고 채색한 ?순수무구의 노래?(Songs of Innocence, 1789)에 이르면 낭만주의의 여명을 알리는 신선한 서정과 순수한 정열을 긍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온 ?경험의 노래?(Songs of Experience, 1794)에서는 세계를 회의적,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의 시는 대체적으로 간결한 시구로 인생 문제를 심화시켰다고 하는데 특색이 있지만, ?천국과 지옥의 결혼? (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 1790)과 같이 사회비판의 정신을 강력하게 표현한 산문집도 있다. 그밖에 1827년 8월 12일 런던에서 죽기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것들을 보면 ?알비온 처녀들의 환상?(The Vision of the Daughters of Albion, 1793), ?유리젠의 책?(The Book of Urizen, 1794), ?로스의 책?(The Book of Los, 1795), ?아하니아의 책?(The Book of Ahania, 1795), ?밀턴?(Milton, 1804), ?예루살렘?(Jerusalem, 1804) 등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의 그림도 우수한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불행하게도 생전에는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 영국 낭만주의 시가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순수를 꿈꾸며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려면,/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걸머쥐고/한 순간 속에 영원을 간직하여야 하리라.” 이 시는 총 132행으로 이루어진 “순수를 꿈꾸며”라는 장시의 첫 4행이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어떤 낭만파 시인들보다도 ‘순수’를 사랑했다. 그는 길가에 피어 있는 조그마한 민들레꽃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두둥실 떠 있는 뭉게구름의 느린 움직임에도 여유와 다정한 미소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순수한 사람’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한 알의 모래알 속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참 아름다운 세계의 모습을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의 빛과 화평과 기쁨을 맛보며, 한 뼘도 안 되는 손바닥 안에서 무한을 느끼고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순간 속에서 내 과거와 미래를 섭리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손길을 꽉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순수’라 하였다. 이런 순수는 육체적인 감각이나 지성으로는 파악할 수 있는 것이 못되며 동심과도 같은 맑고 깨끗한, 편견 없이 투시할 수 있는 직관력에 의해서만 손에 쥘 수가 있다. 어떤 강변둑길 같은 데를 걷다가 보랏빛 제비꽃 한 무더기를 보게 되고 나도 모르게 신선한 느낌과 감동이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결국 그것이 소중한 순수의 순간이 된다는 것이다. 순수의 눈이 떠지면 자연이 경이롭게 보이고 숨을 쉬고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이 그렇게 존귀하고 다정할 수가 없게 된다.

그때부터 사람의 마음은 평온해지고 어진 섬김과 돌봄의 마음이 싹트기 시작한다. 모든 것들은 조화를 이루고 서로 질서를 유지하며 서로 도와서 아름다움을 연출하게 된다. 우리 속에 움트는 시기와 질투는 사라지고 욕심이나 못된 생각도 사라지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격의 순수성이 회복되는 것이다. 이런 순수함은 착함이나 순진한 것과는 다르다. ‘순수’는 자신이 열정적이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힘을 일컫는다. ‘순수’는 가장 아름답고 진신된 것을 향한 끊임없는 열정과 희망이요, 그리고 강한 의지다. ‘순수’는 말이 아니라 느낌이요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일이 만남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루어진 모든 일들은 하나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만남은 가능성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모든 씨앗에서 싹이 터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싹이 턴 모든 것은 씨앗을 뿌리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한 알의 모래와 세계가, 들꽃과 천국이, 손바닥과 무한이, 시간과 영원이 만날 때 통합된 새싹은 트기 시작하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무성 활동사진처럼 지나가는 일상사 가운데서 만나게 되면 천국과 영원은 저 하늘 너머에 있는 구름 같은 것이 아니라,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목마름을 해갈 시켜 주고 현실에 찌든 우리 인생살이에 생수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순수’를 잃었다. 그래서 편견이 너무 많고 너무 따지고 계산을 한다. 본질적인 것은 잃고 현상만 붓 잡고 늘어지기 때문에 시기 질투하고 여유와 웃음을 잃게 되었다. 또한 진정한 사랑과 낭만도 잃었다. 블레이크처럼 ‘순수를 꿈꾸며’ 해바라기가 태양을 쫓아가듯이 우리도 영원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독수리처럼 비상할 때 새로운 활력과 생명을 되찾을 수 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간들이 인정하고 그에게 순복하고 살아갈 때, 우리들의 욕망을 내려놓고 비울 때, 시간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미소와 인정을 되찾을 때, 풀 한 포기와 들꽃들, 공중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 그리고 산과 들의 동물들과 함께 조화로운 노래 가락을 자아낼 수 있을 때, 우리 인간은 ‘순수’를 되찾을 수 있다.

태양을 쫓아가는 해바라기처럼

 

해바라기는 국화과 식물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아, 해바라기여!”라는 시에 대한 이해가 훨씬 빠르게 될 수 있다. 알다시피 국화는 여러 개의 꽃이 모여서 하나의 꽃송이를 이룬다. 꽃잎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의 꽃으로 그 속에 암술, 수술, 씨방이 둘 다 들어있다. 해바라기 꽃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하여 두상화(頭狀花)라 부른다. 두상의 가운데 있는 많은 꽃들을 중심화(中心花)라 하고, 이것이 양성화(兩性花)로 씨를 맺는다. 그런데 바깥 가장자리에 샛노랗고 커다란 꽃들이 빙 둘러 나있는데, 이것을 혓바닥 꼴이라 하여 설상화(舌狀花)라 하며, 씨를 맺지 않는 중성화다.

아주 빠르게 성장하는 해바라기는 계속해서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게끔 세포분열이 일어나 그렇게 해를 바라보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생물시계라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서산에 해가 지고 나면 해바라기는 여태 바라보고 따르던 길잡이이었던 사랑을 잃고 만다. 내일 아침에 저 해가 동쪽에서 다시 떠오른다는 것을 해바라기는 안다. 해바라기는 태양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요 상식이다. 우리는 담장너머에 쑥 머리를 내밀고 자라는 해바라기를 태양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자라는 식물이기에 그 이름도 해바라기라 부른다.

“아, 해바라기여!”라는 시는 블레이크가 해바라기의 속성을 생각하며 쓰게 된 타락한 인간의 성향을 상징한 시다. 해바라기 꽃은 땅 속에 뿌리를 두지만 꽃 자체는 해를 바라보며 서 있다. 이런 속성에 따라 땅속에 뿌리를 두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육체적 경험세계에 구속되어 있음을 상징하고, 해바라기 꽃 자체는 타락한 인간의 영혼을 상징하며, 마지막으로 해는 영원한 순수의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따라서 해바라기 꽃이 하루 종일 해를 바라보며 따라다니는 것은 ‘경험세계’에 있는 인간의 영혼이 ‘순수세계’를 갈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첫째 연에 나오는 ‘태양’은 주님을 상징하고 ‘저 향기로운 황금의 나라’는 영원한 ‘순수세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을 상징하는 ‘해바라기’와 그 세계를 찾아가는 신자를 상징하는 ‘나그네’는 ‘태양’과 ‘저 향기로운 황금의 나라’와 미묘하게 대칭을 이룬다. 또한 ‘시간에 지쳐서’라는 표현은 인간이 속해 있는 ‘경험세계’에서의 자유의 구속과 고통과 절망의 상태에서 ‘순수세계’를 갈망하며 살아가는 중에 세월에 지친 것을 의미한다. 즉 한 걸음 한 걸음 태양을 쫓아가는 해바라기 신자의 지향하여야 할 삶의 단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연에서는 ‘경험세계’에서 겪는 남녀의 육체적인 사랑으로부터 벗어나 ‘순수세계’로 돌아가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들의 무덤’은 남녀의 육체적인 사랑을 구속하는 것이 ‘경험세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해바라기가 가고자 하는 곳이 ‘향기로운 황금의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향기로운 황금의 나라는 곧 육체적인 욕망이 죽을 때 싹트는 세계다.

우리 인간은 육체적인 근본적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이 단계에서 추구하게 되는 것은 흔히 말하는 ‘눈의 기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세속적인 삶의 충동이나 쾌락적인 흥분을 기본적으로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쾌락이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쾌락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충족되어야만 하는 근원적인 욕구라 할 수 있다. 인간치고 이 단계를 건너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단계이지만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어야 할 곳은 못된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다음 단계로 옮겨가게 된다. 그렇다고 그 계단들이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고 사닥다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우리들이 사람들과 사귀며 일을 하고, 그물망과 같은 관계 속에서 사회생활을 영위하며 친구들과 사귀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 살아가는 사회적으로는 가장 온당한 인생단계다. 사회적인 사교의 기쁨을 무시할 수가 없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의 최종 단계가 된다면 참된 실존이 될 수가 없다. 친구를 사귀고 명예를 얻고 돈을 벌어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것이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서는 최고의 행복이요 최종 단계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면 향기로운 황금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실존의 마지막 단계는 모든 육체적인 욕망이나 사회적 욕구를 내려놓고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 태도다. 이 생활은 미적 실존의 단계나 윤리적 실존의 단계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향기로운 황금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야곱의 사닥다리와 같은 신앙생활의 점진적 상승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가야 하고 플라톤이 말하는 영광스러운 도약과 비상을 이루어야만 한다. 해바라기가 태양이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을 헤아리며 향기로운 황금의 나라를 향하여 나가듯이 우리 믿는 신자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욕망으로 수척해지고 창백해진 청춘남녀가 무덤을 벗어나 복된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여 쫓아가듯이 무덤과도 같고 어두운 지옥과도 같은 욕망의 낡은 옷을 벗고 순수의 옷으로 갈아입으려면 뜨거운 영적인 갈망과 신적인 광기(divine madness)가 필요하다. 이런 열망과 신적인 광기 없이 도전 할 수 없고, 비상할 수 없으며, 약진할 수가 없다. 자연의 나이는 들었어도 우리는 늘 순수를 꿈꾸며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나라에 대한 향수와 동경을 채울 수가 없다. 그러나 신앙의 사닥다리 계단을 무시하거나 건너뛰어서도 안 된다. 전진의 발걸음을 늦추거나 뒤로 물러서서도 안 된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한 순간도 바라다보는 시선을 돌려서도 안 되고 달(moon)을 찾아 떠나서도 안 된다. 해바라기에 비유되는 우리 신자는 태양에 비유되는 우리 주님을 한 순간도 놓쳐서는 안 된다. 주님을 붙들고 침궁(royal chamber)으로 들어갈 때까지 놓지 말아야 한다. 보통 미치는 것은 경멸을 받을 수 있지만 신적인 광기는 영광스런 탈출과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된다. 꽃이 태양의 빛과 조응할 때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이, 우리 신자 해바라기도 태양과 조응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꽃과 향기와 열매를 맺게 된다. 태양과 해바라기의 만남과 조응 없이는 해바라기는 꽃을 피울 수도 없고 씨를 열 수도 없다. 주님과 우리 신자의 관계도 그러하다. 순수를 꿈꾸며 태양을 쫓아가는 해바라기 같은 존재가 될 수만 있다면!